임진왜란 (1592년) - 3대 대첩

2020. 8. 30. 02:38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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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3대 대첩




한산도 대첩




조선 선조 25년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는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 없는 섬었기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기에 먼저 판옥선 5~6척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함대를


유인,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에 따라 6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이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까지 이르렀고 그곳에


대기하던 모든 조선 함대가 배를 돌려 그 유명한 학익진을 펼칩니다.


이에 따라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고 


그 결과 왜선 47척을 불살라 격침시켰고 12척을 나포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장군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도주를 하여


이 한산도 대첩은 당당히 조선의 큰 승리로 남았으며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로 불리고 있습니다.





진주 대첩





이순신이 해전에서 수차례 승리를 거두어 서해로 나가는 바닷길을 장악하자


일본군의 해로를 이용한 보급에 차질이 빚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은 바닷길을 포기하고


군량과 전쟁물자를 조선에서 충족하고자 하였고 이에따라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노리게 됩니다.


이에 따라 한산도의 관문인 경상도를 장악하려 듭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 생각하고


공격을 명하게 됩니다.


1592년 11월 7일 일본군은 군사 3만명을 이끌고서 전주성을 포위하였고


조선군은 장군 김시민을 비롯한 관군 3천8백명과 백성이 합세해 결전을 준비했고


결국 전투가 발발하게 됩니다.


일본군이 거세게 공격했지만 성내에 있던 조선군은 화차와 현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


맹렬히 공격했고 백성들 역시 돌과 뜨거운 물로써,  전라도 의병 2천여명은 성외에서 일본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하여 전 조선군이 모두 맹렬히 전투에 임합니다.


승리가 점점 다가오던중 김시민 장군이 일본군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결국 며칠뒤에 순국하게 


되게 됩니다.


싸움에 지친 진주성 공격 이레만에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기한채 마침내 퇴각을 하게 됨으로써


이 진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로 불리게 됩니다.




행주대첩



1593년 2월에 권율장군이 이끄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에겐 금천 금주산에 진을 치게 하고


병력을 이끌어 행주산성에 주둔하게 합니다.


당시 총 병력은 관군 3천명, 의병 6천명으로 구성되있었습니다.


행주산성은 규모가 높이가 120m밖에 안되는 낮은 언덕에 규모도 작은 토성에 불과했었습니다.


이러한 악조건속에서도 조선군은 휘하 장수들을 이끌고 공격해온 장군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군을 맞아 신기전같은 최신무기들과 각종 화포나 바위,화살,불덩이,끊는 물까지 퍼부어댔고


7차례에 걸친 적의 총공격에도 불구하고 모두 격퇴를 하여 승리를 쟁취합니다.


그 결과 최소 5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및 이시다 미츠나리 등등


모두에게 부상을 입힌 대승리를 거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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